마인드 맵 갤러리 고통 오십사, 한생의 귀결 (자성명시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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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11 01:35:14에 편집됨교통 요충지, 안성의 몰락 [안성장시를 예로 들며]
결론
고려, 조선시대 지리적 위치 우상으로 3대 지방 장시로 성장한 안성은 일제강점기 주요 국도 노선에서 벗어나며 몰락하게 된다.
안성
경기도 최남단에 위치하며 서쪽으로 평택, 동북족으로 이천시, 북쪽으로 이천시, 남쪽으로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쪽으로 충청북도 진천군 및 음성군과 각각 경계를 이루고 있다.
북쪽으로 용인 /남쪽으로 천안/ 동쪽 진천군이자리함.
즉 안성시는 경기도-충청북도-충청남도가접하는 주요 길목에 위치. 이러한 입지적 장점으로 조선시대에는 안성은 남부 지방과 중부 지방을 남북으로 잇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내륙과 해안을 동서 방향으로 연결하는 허브의 기능을 수행했다
각 지방 자치 단체의 청사를 기준으로 서울 68 km 인천 72km 수원 36km 경기도청38 km 천안 26 청주 44 충주 58 대전광역시 74 ,서울과 대전 중간 지점에 위치 육상 교통을 통한 중부 내륙 지방으로서ㅓ의 접근성이 매우 양호한 편이다. 국제공항까지 인천국제공항 92, 김포국제공항 75 청주국제공항 40 평택항까지는 40
안성장시의 발달
장시의 존립 기반은 생산력의 증대와 그로 인한 잉여 생산물이었고 이에는 인구,토지, 농업 기술 등이 포함된다. 다만 장시의 유지를 위해서는 상품들의 공간적 이동,즉 수송 수단이 필수적이므로 장시의 발달과 교통 조건은 교역물의 생산 조건과 함께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둘러싸인 안성천 유역은 하천 규모와 유역 면적이 작아 다른 지역에 비해 수운 활동이 활발하지 못했다.
->반면, 주변산 줄기가 고도가 낮기 때문에 한강 유역과의 경제 활동 및 문화적 교류는 활발했다. 또한, 남쪽 방향에 있는 충청남도 북부의 천안, 아산, 당진, 예산 등지와도 교류가 많았다.
장시가 발달하기 위해서는 다수의 소비 인구, 다량의 물자 공급, 교통 중심지와 같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안성은 영남로와 호남로(제주로) 가 지나는 길목이자 두 대로가 합쳐지는 지점이었다.안성에서 상업이 발달한 것은 경기도의 변두리에 있어 장시 억제 정책의 영향을 덜 받은 탓이었다. 또한, . 이와 같은 지리적 장점은 안성 에 대장시가 형성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즉, 삼남(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에서 한양의 교지역으로 들어가는 관문으로서의 안성 지방은 산물의 집결지로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추고 있었다.
안성 지방의 주요 장시 안성장
조선 후기에 안성천 유역에 있던 장시 중 가장 규모가 컸던 것은 수원장과 안성장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안성은 경기와 호남 바닷가 사이에 위치해 화물이 모여 쌓이고, 공장과 장사꾼이 모여들어 한양 남쪽의 한 도회가 되었 다. 그러나 읍 밖은 비록 평지라 해도 땅에 살기가 있어 사람이 살기에는 부적합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내용은 당시 안성장의 규모가 상당했음을 보여 준다. 안성장은 주변 지역의 중심장으로 기능했는데, 동으로는 백암장.이보장∙죽산장, 서로 는 양성장.소사장.평택읍장, 남으로는 충청도의 직산읍장.입장장.성환장 등을 포 접할 정도로 일찍부터 큰 장을 형성했다.
『만기요람萬機要覽』에 의하면 안성장은 19세기 초엽에 이르러 전국 15대 장시로 꼽힐 정도로 성장하였다.
안성장의 역사
안성장이 처음 개설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늦어도 16세기 초로 추정된다.
이후, 고려 시대의 역로 중심지이자 수원과 천안의 중간 지점에 위치해 내륙과 해안으로의 교통이 편리했던 안성 장시가 급성장한 것은 조선 중기 이후로 추정된다.
영조실록의 "안성군의 장시는 한양의 이현시장이나 칠패시장보다 커서 화불이 모여들고 도적도 모여든다"
설명이나 비변사등록의 예로부터 안성으로 가는 길은 삼남 지방에서 올라오는 요충지로서 물건을 만드는 기술자와 이를 파는 장사꾼이 모여든다"는 내용을 보면, 안성장이 얼마나 크고 중요한 곳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안성읍내에 열렸던 안성장은 대구와 전주의 장과 더불어 조선의 3대 장으로 급 힐 만큼 규모가 켰다.
안성장은 영조 때인 18세기 중엽에 와서 크게 발달했는데, 이 는 그 시기 서울의 시전을 보호하기 위해 지방의 향시를 억제하던 정책이 완화되었기 때문이다.
안성장은 한양과 어느 정토 거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성장할 수있었다.
안성장에는 내륙의 물자뿐 아니라 안성천을 통해 아산만의 둔포(,현재 충청남도 아산시 둔포면)로부터 서 해의 수산물까지 반입되었다. 그리고 지하자원이 풍부한 안성 지방에서는 유기의 원 료인 주석과 납을 구하기가 쉬워 옹기와 자기도 많이 생산되었다. 16세기에는 수공업자들이 성장함에 따라 안성의 공장들에서는 유기 외에도 담빗대, 갓,종이, 조리. 도기, 목세공품, 싸리 바구니, 석공예품, 가죽신, 투전(빼쑥) 등을 대량 생산할 수 있 게 되었다(안성군지편찬위원회, 1990, 1441).
안성장이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
당시, 전국의 장시는 1000기를 넘었다. 이런 상황에서 안성장이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안성의 "지리적 장점" 때문이다.
안성은 서울—판교—용인—충주—대구—동래로 이어지는 영남로와 서울—수원—공주—정읍—나주—영암으로 연결되는 호남로의 길목에 있어 교통의 요지였다. 자연스럽게 상인 왕래와 물화 유통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다른 지역보다 이른 시기에 안성장이 개설될 수 있었다.
안성장은 서울과 경기 지방으로 올라오는 삼남의 각종 물화가 보부상의 봇짐과 등짐을 비롯하여 소바리·마바리로 집산되고, 각종 수공업자와 객주·여각·도가 등이 들어서면서 크게성장하였다. 안성은 '제2의 개성이라고 불릴 만큼 상업이 발달한 곳이었다. 심지어, 이틀, 이레(2.7일장을 의미함) 안성장에 팔도 화물 벌열'이라는 말이 유행할 만큼 말이 다. 우리는 매우 이기적이고 인색하거나 약빠른 사람을 가리켜 종종 '깍쟁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깔쟁이라는 말은 장사하는 상인을 '가게쟁이'라 하던 데서 탄생한 말 로 보통 조선 시대에 상업이 융성했던 지방의 명칭이 그 앞에 붙는다. 이를테면, 서울 깍쟁이, '개성 깍쟁이', '수원 깍쟁이', '안성 깍쟁이'라는 말이 그것이다..
안성장시의 쇠퇴 안성장은 일제 강점기에 경부선 철도가 평택을 통과함에 따라 침체기를 겪었다.
전성기였던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안성장은 전국적으로 규모가 아 주 큰장이었다.
하지만 1909년의 조사 자료에 의하면 당시에 안성장의 거래 규모를 능가하는 장이 전국에 30개가 넘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25년에 안성선이 개통되 자 안성장은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1930년대에 안성장은 경부선 철도 연변의 수원장, 남한강 수로변의 양평장과 함께 경기도의 3대 장으로 발전할 정도였다. 그런데 한입 합방 이후 일제는 식민지 침략을노골화하면서 농촌의 정기 시장에 서 보부상을 축출하고 객주들의 세력을 약화시켜 농촌에서의 상업 자본 발달을 억 제했다. 그 대신, 일제는 농촌을 대륙 침략에 필요한 원료 공급 기지로 전환시켰다. 또한 경부선 철도와 호남선 철도의 개통, 도로 개수 작업 등을 통해 신흥 교통 중심 지로 인구와 화물이 집중되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철도 교통의 요지인 수원, 오산, 평택, 성환, 이천, 장호원, 천안 등이 발전하고 전통적인 교통 중심지였던 안성, 용인, 진천 등은 쇠퇴하게 되었다.
안성장의 침체는 광복 후에도 계속됐다.
한국 전쟁 이후 산업 시설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대소비지와 공업 도시를 중심으로 공장이 건설되고 교통망이 확충되었기 때문이다. 또 강원도, 충청북도 북부 지방, 경상북도 북부 지방의 산물이 중앙선 철 도를 통해 바로 서울로 운송됨에 따라 여주나 장호원을 경유해 안성까지 오는 물품 은대폭 줄어들었다. 그리고 서울과 수원 등지의 곡물 상인들이 각 마을에 중개인을 두고 직접 곡품을 수집하여 반출한 일과 농협 등의 협동조합과 정부의 수매 사업은 크게 번창했던 안성의 곡물장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서울과 인천을 중심으로 형성된 경인공업지대의 등장도 안성 지방의 수공업 제품 생산에 좋지 않은 영향을미쳤다.
교통로의 발달과 쇠퇴
[조선시대]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의 중앙 정부는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고 지방 통제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주로 남북 방향으로 도로를 냈다.
조선 시대의 역제 또한역도로 구성되었고 이에 근거해 각각의 소속 역을 관할했다. 이때, 각 역도의 중심이 되는 역을 찰방역이라고 했다. 경기도의 5개 역도는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되어 있다. 그중 현재의 안성 지방 을 지나는 역도는 경기 남부 지방과 충청북도 음성까지 이어지던 양재도이다. 양재도의 찰방역은 과천현에 소속되어 서울과 부산을 잇는 영남대로 구간 중 경기도를 관할했다. 양재도에는 12개의 역이 있었는데 안성에는 강부역, 양성에는 가천역, 죽산에는 분행역이 설치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수도 한양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전 국토를 방사상으로 연결하는 X자형의 4대로에서 시작해 6대로, 그리고 6대로에서 분기한 지선들이 주요 간선 도 로를 형성했다. 조선 시대의 6대로는 18세기 후반까지 유지되다가 19세기 후반에 10 대로로 확장되면서 주요 지점들이 한양과 연결되었다 6대로는 모두 서울을 기점으 로 했으며, 서울 -의주 간 제1로에서 시작해 시계 방향으로 도로에 번호가 부여되었다. 한편, 제2로인 함흥로는 서울에서 함경도, 제3로인 평해로는 서울에서 강원도 동해안의 평해, 제4로인 동래로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이어졌다. 또, 제5로인 제주는 서울에서 전라남도 해남을 거쳐 제주도, 제6로인 강화로는 서울에서강화도까지 연결되었다. 이 가운데 현재의 안성시를 지나는 도로는 제4로와 제5로였다.
[일제강점기의 교통로]
최초의 근대적 도로인 신작로와 주요 간선 철도 교통망이 개설 되었다.
1911년에 공포된 '도로 규칙'을 통해 전국의 도로는 1등 도로, 2등도로, 3둥 도로와 이에 포함되지 않는 등외 도로로 구분됐다.
이중, 국비로 개수를 시행했던 1등 도로와 2등 도로는 현재 의 국도에 해당한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 서울 목포 간 개설된 1등 도로는 안성 지방을 통과하지 않았다.
이 도로는 안양 -수원-오산-서정리-평택ㅡ천안으로 이어지면서 경부선 철도와 병행했다. 서울 -부산 간 도로 역시 1등 도로로 개수되었지만 하남 -광주 곤지암-이천-장호원-충주로 연결되면서 역시 안성 지방을 비껴 지나갔다. (대한토목학회, 1997, 398-400)
한편, 일제는 식민지 수탈과 대륙 침략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철도 건설도 추진했다.
제물포와 노량진을 잇는 1899년의 경인선 개동을 시작으로 1914년까지 우리 나라에는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간선 철도망이 구축되었다. 경부선(1905년 1월 운행), 경의선(1905년 4월 운행), 호남선(1914년 1월 운행), 경원선(1914년 8월 운행)이 그것인데 이 철도들은 국토 전체를 X자형으로 가로질렀다.
1905년 1월 1일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자 안성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당시, 일제는 식민지 수탈을 위해 간척지나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농장이 다수 분포한 지역 또는 식민지형 근대 도시가 형성될 수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교통망을 재편했다. 이로 인해 공주나 안성 처럼 전통적인 정치, 행정, 상권의 중심지는 경부선 철도 노선에서 비껴나게 되었다. 또한, 물화가 철도를 통해 유통되면서 전통적 교통망을 통한 인마의 통행이 줄어들 타격을 입었다.
안성기략, "1920년대 들어 안성 지역의 불상자 문상객주들도 객주들은 대부분 문을 단고 영업을 중지하게 되었다"
이처럼, 경부선 철도가 안성을 거치지 않고 수원평태 성환 천안을 지나가 기 되먼서 안성은 삼남 지방의물류 집산지로서의 기능을 잃어 갔다. 이제 삼남의물류는 더 이상 안성을 거치지 않고도 철도와 신작로를 이용해 서울로 집산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기에 건설된 철도는 내륙의 성우 조선 시대의 주요 중심 취락을 통과하지 않고 비껴가는 방식으로 건설되었다.
경부선 철도 역시 조선 시대에 형성된 영남로를 따라가지 않았다. 즉, 제주로 구간을 따라가다가 대전에서 방향을 동남쪽으로 틀어 부산으로 이어지는 노선이 채택되며 안성 지방에는 철도 교통로가 연결될 수 없었다.
당시, 철도 교통로가 통과했던 지역은 접근성이 뛰어나 상업은 물론 각종 산업 및 경제 활동이 집적되는 신흥 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다. 안성은 1920년대 초반에 이르 면 철도교통 은 물론 도로 교통의 측면에서도 상당히 취약한 곳으로 바뀌었다.
안성선, 철도 운영 멈추다
1925년 11월 경기선으로 개통되었던 안성선은 충청남도 천안에서 출발해 안성을 거쳐 이천의 장호 원으로 연결되는 69.8km의 철도였다. (조선경남철도회사 소속의 사설 철도로서 1925 년 11월에 천안 -안성 구간 29.4km가 개통되고, 이후 1927년 9월에 안성-장호원 구간이 개통되었다. 이 노선이 안성선으로 불리게 된 것은 1946년 5월 10일 국유 철도로 흡수된 이후이다. 1920년대에 안성군에 설치된 역은 고지역(미양면), 미양역 안성역, 안성읍내역, 마전역(삼죽면), 삼죽역, 용월역(삼죽면), 죽산역, 죽산읍내역, 매 산역(죽산면), 주천역(일죽면) 등 11개에 달했다. 당시의 역사 대부분이 오래전에 철거된 관계로 역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 어려운 곳도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44년 전쟁 물자 동원을 이유로 안성읍내역부터 종점인 장호원역까지 철거되는 상황에 처했지만 광복 후 복구해 운행이 지속됐다.
1960년대에는 철도 5개년 계획에 따라 경기남부선이라는 명칭으로 안성역에서 원주 역까지 81.0km를 연장하려 했으나 부설이 취소되었다.
산업이 발달하고 고속 도로가 개통되었던 1970년대에 철도는 운송에 있어 도로 교통의 상대가 되지 못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중부 내륙 지방에서 그 효용성도 점차 상실되어 갔다.
적자 경영이 지속되자 1985년에는 안성선의 여객 영업이 중지되고 이와 함께 입장-안성 구간도 폐지되었다. 마침내, 1989년 1월에는 남아 있던 천안 입장 구간마 저 철거되어 안성선은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현대의 교통로
1960년대 이후, 교통로는 고속도로 건설과 개통을 통해 더욱 발전했다. 1970년대 중반까지는 경제 개발 기반 조성 차원에서 도로 건설 사업이 진행되었고, 그 이후에는 국가 균형 개발을 위해 도로망이 확대되고 있다.
안성시를 경유하는 철도 교통로가 없다.
안성시를 통과하는 고속도로는 고속 국도 제1호 경부고속도로, 고속 국도 제35호 중부고속도로, 고속 국도 제40호 평택제천고속도로 등이다.
마무리하며:경기도와 성장과 안성
수도권의 형성 급속한 경제개발과 근대화정책이 추진된 1960~1970년대에는 수도 서울을 중심으로 그주 변에 광법위한 수도권이 형성되면서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됐다. 1970년 7월 경부고 속도로 개통을 시작으로 1973년 호남. 님해고속도로, 1975년 영동.동해고속도로, 1977년 구마고속도로 등 전국에 고속도로가 건설되어 일일생활권이 확대되었다.
또한 서울역-청량리역, 서울역-수원역 간의 수도권전철이 1974년 8월에 개통되었다. 이처 럼 수도권을 종심으로 하는 전국의 교통망 확충은 도시로의 인구유입을 촉진하여 산업화와 도시화의 속도를 더하게 만들었다. 특히 경인고속도로와 수도권전철은 서울 인구의 분산을 유도하여 수도권의 영역을 넓히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1970년대 이전 경기도에서 도시는 인천 .수원. 의정부 등 세 곳에 불과했으며, 경인고속도로가 개통된 몇 년 뒤인 1973년 안양. 부천.성남이 시로 승격되었다.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인구 역시 급증했다.
전국 평균보다 휠씬 높은 인구밀도를 보인 경기 도는 1970년대 이후 인구증가율이 연평균 20%에 달해 서울ㆍ부산을 제외하고는 전국 최고의 증가율을 나타냈다. 특히 서울과 인접한 안양, 광명, 부천, 성남, 고양, 남양주 등지의 인구밀 도가 높았다. 1970년대부터는 본격화된 경기도의 산업화 및 경인 경수 전철의 개통으로 인해 서울 주변 위성도시의 인구 증가가 두드러진다. 이 시기 폭발적인 성장을 한 부천.안양.성남 등은 연 평균 10~20%에 달하는 엄청난 인구 성장을 기록하며 시로 승격됐고, 기존 도시지역인 수원 및 의정부의 인구도 꾸준히 성장하는 동시에 새로 조성된 신도시(과천 ㆍ안산)와 광명, 고양. 구리. 남양주, 하남, 광주 등 서울 인접지역의 성장이 경기도 인구 증가를 주도했다.
이로써 서울 주변에는 광범위한 수도권이 형성되면서 도시화가 급속도로 이루어졌으며, 이에 속하지 못한 안성을 비롯한 가평.양평.포천.연천.여주 등의 농촌지역들은 인구가 정체 또는 감소하여 도시지역과의 격차는 더욱 커졌다